아버지의 자리

중동지역을 포함한 제3세계를 소개하는 다큐멘타리를 보면, 묘한 감정에 빠지곤 한다.
외지인이 현지 가족을 방문하면, 집안의 가장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음식과 담배 등을 권한다.
여기에서 나는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자리를 보게 된다.
국민 아버지(?) 최불암씨는 집에서 자신만이 앉는 자리가 있으며, 그 곳에는 그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앉지 못한다고 했다.
그걸 시대착오적인 가부장제도의 유습이나 마초적 발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권위는 필요하다.
특히 아버지의 권위가 존중되어야 집안이 평안한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집에는 아버지의 자리는 사라졌다.
어머니에게는 화장대나 주방이 존재한다.
아이들은 아무리 어려도 거기가 어머니의 절대적 지배력이 작용하는 성역임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아버지에게는 그런 자리가 없다.
기껏해야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댐배를 피우는 베란다가 있을 뿐이다.

박완서의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에서 전직 교감이였던 허성은 아내와 딸들이 원하는 삶을 제공하기 위해 공장을 차린다.
기계에 손가락을 잘려 병신(실례되는 표현이자만, 작품에서 주인공이 받는 취급이 딱 이렇다.)이 되고, 존경은 커녕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는 아파트로 이사를 간 후 식사가 되었다고 말하면 주방으로 달려나가 밥을 먹으면서,
안방에 앉아서 밥상을 대접받으며 진지를 드시던 과거를 그리워 한다.
지금의 젊은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 때에는 안방 아랫목에 깔아놓은 보료에 앉아서 신문을 보던 아버지들이 존재했었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가질 수 있는 자신만의 영역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서재이다.
서재는 사색과 권위라는 이질적 요소가 혼합된 공간이다.
최근 모 신문사에서 벌였던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의 서재는 서재가 아닌 가족 독서실이다.
진정한 의미의 서재는 단 한 명만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한다.
[대부]의 초반부에서 돈 코를레오네가 서재에서 다른 이민자의 하소연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들과 식사를 하거나 다른 마피아 보스들과 회의를 할 때에도 그의 자리는 한 가운데이다.
그가 총격을 입고 쓰러진 후, 그 자리는 아들 마이클에게 돌아간다.
이 영화의 제작을 부정적으로 본 마피아들조차 결국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것이 범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서재는 가장 품위있고 고상한 아버지의 자리이지만, 지적인 직업에 종사하거나 여유있는 사람에게 한정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 다음 장소는 차고이다.
여기는 남자의 힘과 기술을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고, 자동차가 등장하기 전에는 헛간이나 마굿간이 그 역할을 했다.
[터미네이터 2]에서 존, 사라, 그리고 터미네이터가 차고에 모여 있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존과 사라는 아버지가 없는 모자가정이다.
여기에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유사 아버지 노릇을 하는 데, 그는 전편에서 존의 아버지를 죽인 존재이다.
더구나, 그는 기계인간이고, 사라는 아들과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여성을 부정해야 했다.
(요컨대 그들은 두 명의 아빠와 한 명의 아들로 구성된, 동성애 부부 또는 sexless 커플로 보인다.)

유럽인들은 미국인들이 수 만 달러짜리 차는 밖에 내놓고, 차고 안에는 잡동사니를 채워넣는다고 비웃었지만,
나는 차고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얘기를 나누고 소중한 추억거리를 보관하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비싼 차에도 값은 존재하지만, 가족과 만들어가는 추억에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식탁을 얘기해보자.
[셰인]에서 셰인을 라이커 목장의 패거리로 오인했던 조 스타렛은 사과를 하며, 그를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식사를 한다.
낯선 손님과 음식을 나누며, 감사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이 영화와 정반대인 [3시 10분발 유마행 열차]에도 나타난다.
식탁에서 감사기도를 올리는 순간 가장은 신의 대리인으로 격상되고, 음식은 성찬이 된다.
왕권 신수설이 아니라, 부권 신수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 추측이지만,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일라이 선데이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곳이 식탁인 것도
아버지의 권위를 부정하는 데 가장 극적인 장소라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폭력의 역사]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의 치부를 가족들에게 들킨 톰은 가장으로서의 권위와 사랑을 잃고 추락한다.
하지만, 딸 사라가 그에게 음식을 권하는 순간 이 냉혈한은 눈물을 흘린다.
그는 가족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지고,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나는 가끔 아이를 낳으면 입시지옥을 피해 외국 유학을 보낼까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보다 훌륭한 교육이 어디 있을까?

아버지의 자리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마음 속에 존재한다.
아버지가 가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려면,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야 한다.
그것은 아버지 혼자서 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버지도 가족도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으니까...

by marlowe | 2008/04/21 21:00 | 문득 떠오른 생각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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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4/23 09: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4/23 11:23
비공개님/ 그런 건 고쳐야죠. 집에서 편하게 입는 건 좋지만, 그것도 정도가 지나치면 실례니까요. ^^
Commented by 비에로 at 2008/04/25 09:29
문득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군요. 아버지께서 그렇게 술을 드시고 늦게 들어오시는 것도 집에서 당신의 자리가 없어인지도.....뭐 요새는 50인치 티비 설치하고는 아예 거실에 이불깔고 주무시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니 아버지의 자리가 줄어든 것만은 확실하네요.
Commented by marlowe at 2008/04/25 10:41
비에로님/ 예전 아버지들이야 권위주의적이였지만, 요즘 아빠들은 나름대로 가족과 처가에 노력하는 데도, 그 만큼의 대접을 못 받는 것 가아요. 일본에서는 퇴직까지 하면, 젖은 낙엽이라고 부른다는 데, 좀 무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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